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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호쿠] 반짝반짝 빛나는 : 1. 재회

*미래 날조

*아직 모르는 게 많은 앙덕질을 합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가로등 빛이 짙은 그림자를 만든다. 발끝에서 튀어나온 짧은 그림자를 멍하니 보며 호쿠토는 언젠가 와타루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은 연기에 재능이 없어요. 당시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잊고 있던 말이지만. 기억이란 정말 느닷없는 것이었다. 그 말대로 정말로 연기에는 소질이 없었던건지 오늘 촬영에서 호쿠토는 9번의 NG를 냈다. 한 씬에 대해서만. ! 히다카씨. 좀 더 사랑한다는 느낌으로,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담아서 연기해주세요. 감독의 말에도 호쿠토는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하고 NG를 연발했다. . . . 연달아 들려오는 그 한 단어가 양심을 들쑤시는 불쏘시개같았다.

 

결국 씬은 오늘 촬영이 끝날 때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내일 마무리하자는 감독의 말에 호쿠토는 그저 죄송하다는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호쿠토가 시나리오를 받은 영화는 꽤 유명했다. 영화가 아니라 감독이. 제작발표회 기사 헤드라인은 온통 감독의 이름 투성이였다.

 

오디션을 통해 공정한 절차를 거쳤음에도 호쿠토의 마음은 잔뜩 먹구름이 낀 하늘처럼 개운치 못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임했으므로 후회는 없으나, 태어난 결과가 꼭 자신의 노력 때문이라고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유명 연예인 사이에서 태어나, 많은 스타를 배출해낸 유메노사키를 졸업하고, 졸업 직전까지도 '트릭스타'라는 이름으로 교내에서도, 교외에서도 시끌벅적했다. 덕분에 기획사와 정식계약을 한 후엔 바로 CF를 찍는 호사까지 누렸다.

 

그런 자신을. 감독은 과연 실력 하나만 보고 뽑아주었을까.

 

안 되지. 호쿠토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때일수록 좀 더 연기에 집중해야한다. 쓸데없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도록. 호쿠토는 가방에 넣어두었던 대본을 꺼내어 오늘 몇 번이고 지적 받았던 부분을 펼쳤다. 나름 절절하게 연기한다고 했는데. 감독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으로. 감독의 말을 떠올리며 대사를 중얼거렸다.

 

"-홋케?"

 

예고 없이 들린 그리운 명칭에 호쿠토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환청인가. 생각할 정도로 오랜만인 음성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자신이 아는 한, 이런 이상한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건 한 명뿐이다.

 

"우와, 맞구나! 홋케~"

 

스바루는 호쿠토의 얼굴을 확인하자 기쁜 표정으로, 꼭 강아지처럼 달려들었다. 껴안으려나. 순간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스바루는 호쿠토와 한 발자국 정도 거리를 두고 인사했다. 그 거리가 그간의 공백을 상기시켰다. 오랜만이네.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스바루를 보며 호쿠토는 반갑게 인사하긴 커녕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도 그럴게, 2년만이었다.

 

"아케호시. 여긴, 어떻게..."

"그건 내가 묻고 싶어. 홋케 집이 이 근처였던가?"

 

호쿠토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촬영장에서 집까지 늘 다니던 길과 달랐다.

 

"정신이 팔려서 길을 잘못 든 것 같다."

"촬영 끝나고 가는 길이야?"

"그래. 촬영장이 여기서 별로 안 멀거든. 이쪽으로 오면 안 되는데, 무턱대고 걷다가 잘못 온 거 같아."

"영화 찍는댔지~ 기억하고 있어."

 

좀처럼 잘 풀리진 않지만. 무슨 영화인지 볼래. 스릴러? 액션? 로맨스? 복슬복슬한 주황색 머리칼이 호쿠토의 시야에서 흔들렸다. 강아지처럼 대본을 향해 들이 밀어진 머리를 한 대 콩 때려주려다 순순히 대본을 내밀었다.

 

로맨스. 난 조연이지만.”

형광펜 칠해진 거 맞지? ?”

 

무슨 역할이야? 스바루는 형광펜이 칠해진 대사를 눈으로 따라 읽으며 말했다.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동급생.”

 

스바루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이 더욱 동그랗게 변해있었다. 짝사랑?!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이번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종래엔 배를 잡고 웃는 터라 호쿠토의 미간에 점점 주름이 잡히는지도 몰랐다. 그만 웃어. 아케호시! 하하하.

 

그치마안-.”

 

어린아이처럼 말꼬리를 늘이자 이상하게도 고등학생 때가 생각났다. 여기는 유메노사키 연습실이고 자신과 스바루는 트릭스타로 묶인 인연이라는 착각. 가늘게 접힌 푸른색 눈동자가 호쿠토를 향했다. 여전히 맑은 하늘색이었다.

 

짝사랑하는 홋케라니 너무 안 어울리잖아!”

 

착각이 아니라, 우리를 묶던 끈이 그렇게 질기지 않다는 걸 깨닫지 못한 오만이기도 했다. 크게 말을 내뱉고서도 스바루의 얼굴에서 한참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잔뜩 웃고 난 후에야 스바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홋케? 마주 선 호쿠토가 웃지도 자신을 질책하지도 않는다는 걸 깨달은 직후였다.

 

안 어울리는 건가.”

 

재빨리 살핀 얼굴은 스바루가 알던 언제나의 호쿠토 같이 무표정했다.

 

오늘 촬영에 NG를 많이 내서. 역시 이미지에 맞질 않으니 연기가 미흡한 게 금세 티가 난 거겠지.”

 

조금 더 연습해야겠군. 말하는 내용도 스바루가 알던 호쿠토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스타카토처럼 뚝뚝 끊어지는 문장에 마음이 쓰였다. 마음에 걸리는 것을 꺼내도 괜찮을까, 잠시 고민한 스바루는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도 피해가는 곳 하나 없는 직구를 날렸다.

 

왜 그렇게 풀이 죽었어?”

 

끝이 축 늘어진 눈썹 아래에 뜬 맑은 하늘엔 명백히 호쿠토에 대한 걱정이 서려있었기에 스바루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호쿠토가 스바루에게 악의가 있음을 의심하는 순간은 없다.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런 순간은 없을 것이라 호쿠토는 생각했다. 스바루에 대해 잘 아니까. 그런 마음을 품지 않을 애라는 건 전 세계인의 앞에서도 증명해보일 수 있을 정도였다.

 

별 거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관자놀이가 욱씬거려 호쿠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까진 피곤한 줄도 몰랐는데 말로 뱉고 보니 잊었던 피곤이 전신을 감쌌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어 번 꾹꾹 누른 다음에야 호쿠토는 편안한 얼굴로 스바루를 보았다.

 

그런데 아케호시 넌 이 시간에 웬일이지?”

 

갑작스레 던진 안부에 화제 전환이 서툴구나 느끼면서도 스바루는 질문에 거리낌 없이 답했다. 지금 숙소가 이 근처라서 잠깐 산책을 나왔다고. 숙소? 스바루가 숙소 생활을 한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집에서 스케쥴을 다니는 게 아니었던가. 희미하게 뒤따른 말에 스바루가 인상을 쓰곤 홋케, 또 단체 채팅방 안 읽었지! 타박했다.

 

저번 달 셋째 주부터 여기서 공연한다고 얘기했잖아!”

 

그리고 우리 집은 학교 근처라는 거 잊었어? 덧붙인 말은 납덩이가 되어 마음의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스바루의 말은 사실이었다. 호쿠토는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가 쌓일 때마다 제대로 읽지 않고 방을 나오곤 했다. 스케쥴이 끝나고 떠있는 알람을 누르면 얼핏 보이는 이름은 대부분 스바루와 마코토였다. 가끔 마오가 두 사람 사이에 섞여 있었지만, 빈도가 적었다. 일전에는 가벼운 충동으로 방을 나가는 대신 쌓인 메시지를 단번에 내려 스마트폰의 자판을 두드렸다. [영화를 찍게 됐어.] 사전 미팅 겸 대본 리딩을 마치고 건물을 막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관심 줘, 신경 써줘. 차오른 미안함은 스바루가 징징거릴 때마다 모래 폭풍을 맞는 사막의 바위처럼 깎여나갔다.

 

귀찮게 하지 말고 떨.”

 

떨어져, 라고 말할 셈이었는데 스바루는 말로만 칭얼거릴뿐 여전히 호쿠토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서있었다. 어느 누구든 타인이라면 당연한 거리인데 호쿠토는 그게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부모님이 이런 간격을 유지한다고 잠깐 생각해보았으나 아무 느낌도 없었다. 오히려 더 간격을 벌려주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할머니로 대상을 바꿔보니 애틋한 느낌이었다. 어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 그래? 많이 피곤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멈춘 호쿠토를 스바루가 걱정스럽게 살폈다. 홋케 집 가는데 얼마나 걸려? 그는 호쿠토를 늦은 밤에 길거리에 방치해두는 게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한 듯 도로를 두리번 거렸다. 택시라도 찾는 듯한 눈치에 호쿠토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괜찮다. 걸어서도 돌아갈 수 있어.”

데려다 줄게.”

 

걱정 돼. 재빠르게 말이 덧붙었다. 괜찮다고 말하려던 호쿠토의 입을 막으려던 의도가 느껴졌다. 호쿠토는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 했다. 1230분이 막 넘어가려는 시간이다. 자신의 집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가게 되면 스바루가 집에 들어가는 건 아무리 빨라도 1시를 넘기게 된다. 씻고 자리에 누우면 2시가 가까운 시간일 텐데. 공연을 한다면서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어도 되는 건가. 아무리 천재라곤 하지만 스바루의 바보같은 면모를 생각하면 대책이 없게 느껴졌다.

 

시간이 너무 늦어. 아케호시 넌 내일도 공연이 있지? 컨디션 조절을 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제 실력을 백퍼센트 발휘할 수 있다.”

, 잔소리~. 여전하구나, 홋케는.”

게다가 난 혼자서도 돌아갈 수 있어.”

그치만 정말로 걱정된다고! 홋케가 집에 무사히 돌아가기 전까진 제대로 쉬지도 못할걸!”

 

스바루는 팔짱을 끼듯이 자신의 양 팔을 부여잡고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한참을 음, 하는 소리만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 불쑥 고개를 쳐들고 호쿠토를 뚫어지게 보았다. 흡사 어려운 재판을 앞둔 재판장 같은 표정이었다.

 

고민은 길었다. 과장되게 몸을 웅크리고 끄응 소리를 낼 때는 얼마 안 가 고개를 들겠거니 했지만, 스바루의 고개는 그의 고민이 깊어짐을 나타내듯 점점 더 숙여졌다. 한참만에야 보인 얼굴은 여전히 어딘가 후련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호쿠토의 기억엔 없는 신중한스바루였다.

 

우리 집으로 가자. 촬영장이 근처랬지?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도 별로 안 머니까 내일 가기도 편할 거야.”

 

말을 쏟아내고선 지체 없이 뒤돌아 걷기 시작하는 등을 호쿠토는 잠시 가만히 보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걱정된다는 이유로 혼자 보낼 수 없고. 데려다 주겠다는 건 호쿠토가 싫어하니, 결국은 스바루 자신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데려가 재우겠다는 사고의 흐름은 호쿠토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홋케~. 앞질러 간 스바루가 걸음을 멈추고 호쿠토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걱정을 끼쳤던 걸까. 연락을 잘 하지 않고 단체 채팅방도, SNS도 하지 않는 자신의 소식은 건너 지인에게 듣거나 기사로 접하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두문불출한 동창이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건 꽤나 걱정되는 그림임을 인정했다. 호쿠토는 말없이 스바루를 따라 걸었다.

 


 

숙소로 가는 길 내내 스바루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 그리 좋지는 않으며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니 불평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면서 이제와 돌아간다는 선택을 해도 이해하고 데려다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말하니까 꼭 돌아가라는 것처럼 들리는군. 무심코 한 말에 스바루가 화들짝 놀라며 내가 언제?! 하고 소리를 질렀다. 가로등 빛에 비친 얼굴이 살짝 상기된 것처럼 보였다.

 

처음 와 본 스바루의 숙소는 으름장을 놓았던 것치곤 더럽지 않았으나 깨끗하지도 않았다. 소파 위에 던져진 옷가지들과 탁자 위에 쌓인 플라스틱 병들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사람 사는 집이란 느낌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 들어간 스바루는 벗어둔 옷가지들을 황급히 주워들고 베란다로 가져갔다.

 

들어와도 돼!”

 

베란다에서 외치는 소리에 호쿠토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작게 말하자 마음껏 실례하세요, 신이난 목소리가 대꾸했다. 거실 한 가운데 서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사이 스바루는 베란다에서 나와 욕실로 사라졌다.

 

도와줄까?”

 

아니! 살짝 열린 문틈으로 소리가 울렸다. 수도꼭지를 열었는지 물이 콸콸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떨어지는 물소리에 호쿠토는 도우러 들어갈까 고민하다가-스바루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다.- 소파에 앉았다. 푹신한 쿠션에 몸을 맡기니 그제야 긴장이 풀린 몸이 피곤을 호소했다. 자연스럽게 눈을 감자 그대로 졸음이 밀려오는 듯 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눈꺼풀은 다시 뜨이길 거부하고 의식이 혼미해져갈 즈음 뺨 위로 온기가 닿았다.

 

, 자는 게 아니었네.”

 

잠든 줄 알았어. 뺨 위를 살짝 누르던 손가락이 금세 떠나갔다.

 

많이 피곤해? 씻을 수 있어?”

 

욕조에 물 받아놨어. 조잘조잘 말하면서도 스바루는 수건과 갈아입을 옷 따위를 가지러 방 곳곳을 돌아다녔다. 잘 개어놓은 옷감을 품에 안고 호쿠토의 등을 욕실을 향해 떠밀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욕조 전쟁이 벌어지니까 손님이 먼저야. 터벅터벅 밀리는 힘에 걸음을 떼면서도 호쿠토는 눈썹 끝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도 있는데.”

괜찮아.”

내일도 공연이잖아.”

나는 저녁공연이야. , 그치만 홋케가 욕조에서 잠드는 건 조금 걱정이네. , 이렇게 된 거 같이 들어갈까?”

 

고개를 돌리자 푸른 눈동자가 집어삼킬 듯 가까운 거리에서 보였다. 그 거리감에 호쿠토는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눈이 마주친 채로 호쿠토는 말이 없었다. 침묵의 시간은 어색함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이어졌다. 스바루는 어깨를 잡고 있던 팔을 쭉 뻗어 호쿠토와의 사이를 벌렸다. 장난이야. 익살스러운 말을 덧붙인 스바루가 들고 있던 옷과 수건을 욕실 앞 바구니에 넣었다.

 

여기다가 둘게. 난 거실에서 TV 보고 있을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아케호시 너 키가 좀 큰 건가?”

우와, 뜬금없이?”

전보다 시선이 가까워진 것 같아서.”

 

스바루는 입을 벌린 채 몇 초간 멈추었다. 꼭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DVD 화면처럼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홋케랑은 고등학생 때 보고 처음 보는 거니까 그렇겠네?”

 

나도 최근엔 안 재봐서 정확히는 몰라. 스바루는 하하하 웃었다. 2년만의 홋케 이상해. 이 상황이 웃기다는 듯 가늘게 눈을 접는 모습에 호쿠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행동은 멍하고 느릿했다. 스바루가 고개를 갸웃하며 정말로 이상하네, 추임새처럼 덧붙였다.

 

무슨 일 있었다면 말해도 괜찮아. 들어줄게.”

 

호쿠토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무슨 일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다. 그저 오늘 촬영이 다른 날보다 잘 풀리지 않았고, 그 이유가 도무지 호쿠토가 이해할 수 없는, 능력 밖의 부분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게 없었다. 잠깐 생각을 하다가 호쿠토는 다시 고개를 들고 스바루를 보았다. 스바루는 그 일련의 행동을 보더니 눈썹을 더욱 비틀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보며 호쿠토는 자신의 능력 밖 고민을 스바루는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난 게 어색해서 그런가?”

 

스바루가 중얼거렸다. 호쿠토의 무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턱에 손을 올리고 골똘히 무언가를 고민했다.

 

-사랑. 호쿠토에겐 너무 먼 단어였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감정이라 확신해도 좋을 정도였다. 가족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우정. 타인에 대한 연민과 배려. 엇비슷한 감정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란 건 대체 뭐지? 호쿠토가 경험으로 쌓아올리고 떠올린 수만 가지 감정들 사이에 그것과 부합하는 건 없었다. 짝이 맞지 않는 퍼즐처럼 온전히 맞물리지 않았다.

 

호쿠토는 유메노사키에 있던 시절의 스바루를 떠올렸다. 1학년 때 잠깐을 빼고선 늘 같이 있었다. 3년 내내 같은 반이었고, 2년이 같은 유닛이었으며,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친구였다. 그러니 스바루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하는 한, 스바루가 누군가를 짝사랑 할 기회는 없다.

 

트릭스타는 늘 바빴기에 이성을 만날 기회가 없었고 유일하게 곁에 있던 이성인 안즈는 누구와도 사랑하는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졸업 후 만나지 못한 기간 동안 스바루가 누군가를 만났을 지도 모르지만, 그랬다간 분명 기사가 떴을 것이다. 마코토와 마오가 전화로 알려줬을지도 모른다. 스바루 본인이 호쿠토에게 상담의 전화를 걸었을 지도 모른다. 2년 동안 호쿠토에게 그런 전화가 걸려온 적은 없었다.

 

긴 고민은 끝을 맺었다. 호쿠토가 내린 결론은 이 고민은 스바루가 이해할 수 없다.’에 다다랐다.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을 끼쳤군, 아케호시.”

 

순간 스바루의 눈이 크게 열리고 꿈뻑꿈뻑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전등 빛이 담긴 눈동자는 유난히 반짝거렸다. 말을 하려다 말고 스바루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방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행동에서 호쿠토는 성숙함을 느꼈다.

 

홋케 바보! 서로서로 지탱하면서 성장하는 게 트릭스타잖아! 고민이 있다면 의지해줘! 홋케의 힘이 되고 싶어. 재잘재잘 떠드는 어린 목소리가 호쿠토의 귓가를 맴돌았다. 당장이라도 그렇게 말할 것 같았는데, 생각과 달리 스바루는 침묵을 지키며 말을 찾고 있었다.

 

우리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구나.”

 

한참 만에 떨어진 말은 한 음으로 이어지는 노래만큼 단조롭고 발아래의 중력보다 무거웠다. 스바루의 말은 호쿠토를 중력처럼 잡아당겼다. , 홋케의 고민이 뭐야! 상상 속의 스바루는 웃으며 호쿠토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온기를 나눠줄게. 팔랑거리는 말로 포옹을 예고하는 어린 스바루와 달리 눈앞의 진짜스바루는 머쓱한 웃음을 지은 채 서있었다. 호쿠토의 마음은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고장난 중력 위에 선 것 같았다. 급속도로 피곤이 몰려왔다.

 

스바루의 눈동자가 떼굴떼굴 굴러가더니 벽에 걸린 시계에 닿았다. 시간을 확인한 스바루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홋케의 어깨를 떠밀었다.

 

홋케 얼른 씻고 와! 수면 부족은 큰일이야~.”

 

모처럼 잘생긴 얼굴이 칙칙해져! 우스갯소리와 함께 등 뒤로 욕실 문이 닫혔다. 닫힌 문을 슬쩍 본 호쿠토는 자신이 한 말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었는지를 검토했다. 지극히 논리적인 판단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스바루가 그렇게 느꼈다면 반드시 사과해야 할 문제였다.

 

우선 씻으며 마음을 정리하고 욕실을 나가 스바루에게 사과하자. 스케쥴처럼 과정을 정리하며 셔츠의 단추를 끌를 때, 호쿠토는 문득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지쳤다는 감정임을 깨달았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유난히 피곤한 날. 그런 날 스바루를 만난 게 운이 나빴다면 나쁜 일이다.

 

욕조에 받은 물에선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온기가 호쿠토를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