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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러프] 이건 무슨 열쇠야?

*커미션으로 썼습니다!



카이는 들고 온 가방을 침대 옆에 대충 기대놓았다. 짐이라고 챙겨온 건 그게 전부였다. 애초에 가진 물건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하나둘 챙기다 보면 어차피 곧 돌아갈 텐데 뭐하러 같은 생각이 들어 도로 풀었다. 그러다 보니 챙길 수 있는 게 갈아입을 옷 한 벌과 닥터헬과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침대에 앉아 가져온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같이 찍었다고는 하나 카이는 애매하게 측면으로 나왔고 닥터헬은 얼굴이 사진 귀퉁이에 1/3 정도만 보였다. 그나마 중앙에 있던 카이는 초점이 맞아 선명했지만 닥터헬은 물방울이라도 맺힌 것처럼 흐릿했다. 연구실 청소 날, 두꺼운 서적을 한가득 안고 옮기던 카이를 부른 닥터헬이 무작정 셔터를 누른 덕분에 완성된 엉망진창의 투 샷이다. 삼각대도 없이 책상에 놓고 팔만 쭉 뻗어 찍은 사진이 제대로 나올 리 없었다. 이번엔 제대로 해볼까. 다시 찍자는 말에 카이는 됐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청소하다 말고 가족사진을 찍자는 말이 그렇게 낯간지러워 싫다고 난리를 쳤다. 그냥 얌전히 찍을 걸 그랬나. 의미 없는 후회가 들자마자 카이는 눈을 치켜뜨곤 눈앞의 빈 침대를 살폈다. 그리곤 다시 가방 깊숙이 사진을 숨겨 두었다.

 

 

이건 무슨 열쇠야?

카이 러프

 

 

방을 혼자서 못 쓴다고?”

여기선 모두 룸메이트가 있어! 외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지.”

 

절규와 같은 질문에 돌아온 답은 한없이 밝았다. 이름만 동화 나라인 게 아니라 관리인들 머리도 죄다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천진난만했다. 오기 전에도, 오는 동안에도 여기 와서 혹시 외롭진 않을까 따위를 걱정한 적은 없다. 허어. 헛숨을 뱉은 카이가 허공만 보며 가만히 멈춰 있자 안내인은 입을 가로로 쭉 늘리더니 서둘러 카이를 안으로 이끌었다. 걱정 마. 금방 친해질 수 있어. 네 룸메가 될 사람은 나도 잘 아는데 그렇게 나쁘지 않아. 하지도 않은 걱정을 위로받으며 카이는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 걸을 때마다 종아리께로 단출한 짐 가방이 툭툭 채였다. . . .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리는 마찰음이 토닥이는 소리랑 비슷했다.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룸메이트는 한나절이 지나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방이 조용했던 덕분에 카이는 천천히 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들고 온 게 없어 텅 빈 카이의 자리와 달리 룸메이트의 자리는 잘 정리된 듯 어수선했다.

 

그건 어수선하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했다. 의자 팔걸이에 걸쳐진 검은색 가죽 자켓, 옷장 옆에 붙여진 포스터(꽤 오래되었는지 사진이 누렇게 변해 있었다), 침대와 맞닿은 벽에 가랜드처럼 건 끈과 사진들. 침대 위엔 벗은 옷들이 멋대로 나뒹굴고 책상 위엔 종이와 연필이 한구석으로 밀려났다. 카이는 룸메이트라는 사람이 섬세함과는 거리가 멀 거라고 짐작했다.

 

누구?”

 

첫인상으로 상대를 속단하면 안 되듯이 방의 모양만으로 인상을 결정하는 건 매우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라는 걸 카이는 알고 있었지만,

 

아아, 맞다! 오늘 룸메가 들어온다고 그랬었지.”

 

, 내 정신 좀 봐. 대답할 틈도 없이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그럼 그렇지, 하는 자신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참 뒤 들어온 룸메이트의 얼굴이 깜짝 놀랐다가 혼자서 이해했다가 하며 변하는 표정이 연극배우 같았다. 헤집는 손길에 따라 하얀 머리카락이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졌다. 왼쪽 귀에서 빨간 십자 모양 피어싱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얀 머리에 빨간 피어싱. 10m 밖에서 봐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는 꼭 주인의 방과 똑 닮았다.

 

짐 정리는 끝냈어? 방이 깨끗한 걸 보니까 아직?”

…….”

덜 했으면 도와줄게.”

뭐냐.”

아 참참. 내 이름은 러프고.”

 

뭐냐는 의문형이었지만 질문은 아니었다. 정신없는 상황을 스스로 정리해보기 위해서 이게 뭐지?’ 라고 서두를 던져본 것과 같았다. 그랬는데. 상황정리는커녕 룸메이트에게 내 이름은 러프고 룸메가 온다고 해서 방을 미리 좀 치워 봤는데 깨끗하지? 시트도 어제 새로 빨았어 따위의 불필요한 정보를 더 들어야만 했다.

 

평생을 닥터헬과 둘이서 조용하게 살아온 카이에게 러프는 감당하기 힘든 타입이었다.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답을 할라치면 새로운 질문이 이어졌고 주절주절 혼잣말을 꺼내는데 카이가 그 속도를 따라가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

?”

난 별로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 없어.”

 

욕실이 어쨌다는 얘기를 하던 러프는 그제야 카이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어차피 여기 오래 있지도 않을 거야. 소원의 돌만 찾으면 바로 돌아갈 거니까.”

그래?”

 

호들갑을 떨던 것과 달리 러프는 쉽게 물러났다. 이제야 한시름 놨다는 생각에 카이가 작게 숨을 몰아쉬기가 무섭게 러프가 눈에 힘을 주어 크게 떴다.

 

근데 그게 쉽지는 않을 걸? 나도 소원의 돌 때문에 여기 왔거든.”

 

턱 끝에 숨이 막힌 기분이 났다.

 

그래서 어쨌다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결연한 목소리를 들으며 별 대꾸를 못 한 건 명백하게 그 기백에 눌린 것이다.

 

첫 만남이 엉망이었던 덕분에 둘은 한 방에서 룸메이트 생활을 하면서도 전혀 패턴이 겹치질 않았다. 하나가 일어나 있을 때 하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자고 있지 않아도 자는 척 침대에 모로 누워 있었다. 좁은 방에서 서로를 마주치지 않기 위해 꽤 필사적이었다는 소리다.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써도 서로를 안 볼 수는 없었다. 빈방에서 서로의 흔적을 마주하는 건 당연했고 런너들이 모이는 곳도 거기서 거기라. 원치 않아도 카이는 식당에서 늘 시끌벅적한 무리 사이의 하얀 머리통을 보았고. 마찬가지로 러프도 식판을 정리하러 가는 길에 혼자 밥을 먹는 룸메이트를 봤다. 눈길이 오래 머무는 일도 누군가 먼저 아는 체하는 일도 없었다. 길이를 가늠하기 힘든 광활한 운동장에서 카이는 러프가 달리는 모습을 처음 봤다. 여기서 준 체육복을 입고 있자니 괜히 어색해서 카이는 바짓단을 당겼다 놓으며 한참 옷 태를 살피느라 한 자리에 서서 남들 하는 모양새나 봤다. 걔 중에서도 러프는 눈에 띄었다. 찾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하얀 머리칼과 빨간 피어싱이 카이의 시야에 들어찼다.

 

그 애는 거꾸로 달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애를 쓰는 얼굴로 자꾸만 뒤로 갔다. 어떻게 보면 우스운 장면 속에서 카이는 불현듯 옷장 옆에 붙은 포스터를 떠올렸다. 왜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냥, 하얀색이었을 종이가 누렇게 뜨고 겉이 너덜해진 포스터 속 파란색 바이크가 깜짝 상자처럼 뿅 하고 튀어 올랐다.

 

나도 소원의 돌 때문에 여기 왔거든.

 

기백이 아니라 절박함이라서 그렇게 숨이 막혔나.

 

러프, 너는 그러고도 진짜 잘 뛴다.”

내가 이렇게 뛰어도 우승이다.”

허세 부린다, .”

 

다들 비슷한 시기에 이곳에 왔다고 들었는데 러프는 친화력이 좋은 건지 늘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적어도 카이가 볼 때는 그랬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주위가 시끌벅적했고 운동장에 나와 운동을 할 때도 세상 소음은 다 모아놓은 것처럼 시끄러웠다. 턱을 따라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친 카이가 그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옷장 옆 포스터가 카이를 잡아 당겼다. 웬만큼 눈치가 없지 않고서야 러프가 소원의 돌을 쟁취해 하고자 하는 게 뭔지 모를 수가 없다.

 

나한테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생겼어?”

 

언제 왔는지 입구에 러프가 서 있었다.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아니라 카이는 다시 포스터 속 바이크나 봤다. 오히려 러프는 웃고 있었다.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려 제 포스터에 관심을 보이는 카이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질문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소원의 돌 받으면 뭐 할 거냐?”

네가 먼저 알려주면.”

싫어.”

, 이건 예상 못 했다.”

 

러프는 침대 위로 걸터앉았다.

 

너 이름이 뭐야?”

 

카이는 그제야 포스터에서 시선을 떼고 러프를 봤다. 표정을 보아하니 순수한 질문인 모양이라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왜 갑자기 통성명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야. 여기 안내해주는 분이 다 알려주셨거든.”

 

답이 없는 카이가 기분이 상했다고 짐작했는지 또 쏟아지는 말이 한참이었다.

 

근데, 그냥. 이런 건 직접 얘기해야 기분이 살잖아.”

 

카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쪼잔한 새끼. 러프가 툴툴거렸다. 너 진짜 치사하다. 이름 하나 가지고 뭐 그렇게 비싸게 구냐. 구시렁대는 것도 한참이었다. 카이는 그 모습이 러프답다고 생각했다. 며칠 보지도 않았으면서 웃기는 생각이다.

 

난 꼭 소원의 돌이 있어야 해.”

알아. 말했잖아.”

너도 그래?”

…….”

너도 그게 꼭 있어야 하냐?”

 

몰라서 묻는 게 아니란 것을 러프는 금세 알아챘다. 그래서 이를 악물었다. 왠지 좋은 소리가 나올 것 같지가 않아서 그랬다. 외출한다고 꽉 닫아놓은 창에 환기되지 못한 공기만 답답하게 좁은 공간을 빙글빙글 돌았다. 러프가 답답한 속을 달래려 숨을 크게 들이쉬었으나 폐 속이나 방 안에 갇힌 공기나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다.

 

진짜 재수 없다, .”

 

지금 막 러프는 카이가 눈치챈 절박함을, 제가 아닌 카이에게서 마주하고 있었다. 하하, . 메마른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 * *

 


우습게도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한 방에서 같이 깨어 있는 시간이 늘었다. 어느 한쪽이 억지로 오지 않는 잠을 청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취침 시간이 되면 차례로 씻고 나와 잠이 들었고 아침 해가 뜨면 먼저 일어나는 순으로 씻고 밥을 먹으러 갔다.

 

배수구가 물을 삼키는 소리를 들으며 깬 카이는 여전히 잠이 덜 깬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잠을 덜어내는 사이 욕실에서 나온 러프가 젖은 얼굴을 수건에 닦다 말고 풉,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너 지금 얼굴 진짜 웃기다.”

 

찐빵 같아. 웃으며 하는 말을 듣다 못 한 카이가 베개를 집어 던졌다. 그걸 또 얄밉게 피한 러프가 빨리 안 씻으면 다 터지겠네, 했다. 날아오는 것도 대꾸도 없길래 그런가 보다 했더니 얌전히 욕실로 가는 줄 알았던 카이가 모른 척 러프의 등을 팔꿈치로 쳤다. 퍽 소리가 난다. 실실 웃던 상판이 침대 위로 뭉개졌다. !! 큰 고함이 들리자 카이는 미소를 띤 얼굴로 욕실 문을 잠갔다.

 

카이는 끝내 러프에게 제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영영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이제 와서 내 이름은 카이야 하고 말하는 게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카이.”

 

알려주지 않아도 러프가 알아서 잘 부르고 있기도 했고.

 

머리 좀 잘 말리고 나와. 바닥에 온통 물 튀잖아.”

 

러프가 들고 있던 수건으로 바닥을 훔치며 욕실로 가더니 새 수건을 꺼내 카이의 머리 위로 던지듯 덮었다. 카이는 얌전히 머리 위로 수건을 문질렀다. 이 정도면 대충 다 말랐다고 생각해서 나왔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나 참, 자기가 무슨 고양이도 아니고.”

뭔 헛소리야.”

뭐가.”

고양이가 어쩌고. 재밌지도 않다.”

재밌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니까 재미가 없지.”

 

무슨 실없는 소리를 하냐며 러프는 드라이기를 카이에게 넘겼다. 스위치를 올리니 뜨거운 바람이 큰 소음을 몰고 뿜어져 나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은 카이가 수건과 드라이기를 쥐고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러프는 근처에 앉아 가만히 그 모습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카이는 얘 또 이상한 소리 하겠네, 하고 짐작했다.

 

너 뭔가 고양이 같네.”

 

카이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러프는 손가락을 자신의 눈 밑으로 갖다 대며 바쁘게 말을 이었다. 눈 밑이 이렇게 삐죽한 것도 그렇고 성격도 까칠한 게 고양이랑 딱이네. 관찰하듯이 얼굴을 조금 들이밀고 그렇게 말하는데 카이는 할 수만 있다면 러프를 잠깐 기절시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은 카이가 착한 심성을 가져서는 아니고 잘못했다간 온종일 깨어나지 못하게 할까 봐 걱정이 되서 그랬다. 소원의 돌을 갖기 전에 사고를 쳐서 쫓겨나면 곤란하다.

 

예전에 고양이 때문에 사고 난적이 있거든?”

 

러프는 또 카이를 두고 홀로 빠르게 앞서 나갔다. 대답하지 않는 걸 계속 이야기를 듣겠다는 사인으로 해석했는지 줄줄 물어보지도 않은 얘기를 막 한다. 고양이 때문에 사고 났다고 하는 건 좀 이상하긴 한데. 내가 원래 바이크를 탔었거든. 저거. 포스터에 있는 거랑 비슷한 모델이었어. 돈이 없어서 똑같은 건 못 샀고. 아무튼 바이크를 타고 가는데 길에 고양이 하나가 이렇게 앉아 있는 거야. 노란색이랑 하얀색이랑 섞인 고양이었어. 진짜 귀여웠는데. 아무튼 내가 가까이 가는데도 걔가 피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피하려다가 이렇게…….

 

이건 웃으라고 한 소린데.”

 

넘어지는 시늉을 하던 러프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어느새 바싹 마른 머리는 드라이기 바람이 필요 없었다. 따끈해진 드라이기를 바닥에 놓았다. 재미없는데. 퉁명스럽게 말해도 러프는 상관없다는 듯 목을 긁더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천장을 보고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조금 더 젖혀 옷장을 본다. 그때 사고 나서 바이크를 아직도 못 타고 있는데.

 

이 포스터 붙여둘 자신이 없어서 몇 달은 서랍에 처박아 놨었어.”

 

이런 얘기를 하고 싶으면 머리를 말리면서 할 게 아니라 뭔가를 먹으면서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럼 먹고 있으니까 뭐라고 대꾸를 해줘야 하나, 하는 고민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뭐 이제 그 정도는 괜찮아서.”

 

카이가 복잡한 생각에 잠긴 동안 러프는 알아서 이야기의 끝을 맺고 있었다.

 

사람은 다 괜찮아지나 봐.”

…….”

…….”

그렇게 줄줄 말해도 난 말 안 해줘.”

그런 의도로 말한 거 아니거든. 카이 넌 전생에 꽈배기였을 거야.”

 

내가 뭐?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한 대답이 어이없이 느껴졌다. 닥터헬이 보았다면 분명 한 마디 했을 거다. 닥터헬에 대한 죄책감으로 혼자만의 반성을 하는 카이에게 깃털보다 가벼운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어쩌다가 이 얘길 하고 있더라.”

 

상대가 이런 사람이면 까칠해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요, 아빠?

 


* * *


 

짤랑짤랑.

 

카이는 잠들지 않았다. 러프보다 먼저 씻고 나와 침대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지만 자는 건 아니었다. 평소엔 이쯤 누워 있으면 스르륵 잠이 들곤 하는데 오늘따라 의식이 또렷한 게 잠이 안 왔다. 벽을 본 채로 눈을 감고 있으니 잔다고 오해할 법도 하다. 느긋한 샤워를 하고 나온 러프가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 걸 감은 눈 너머로도 알았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 놓인 정신이 수중처럼 무거워질 때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너무 선명해서 꿈에서 들은 소리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사람은 다 괜찮아지나 봐.

짤랑짤랑.

 

이상하게 평소보다 머리가 한결 맑아지는 기분이 났다. 자장가도 아닌데 기억 속 러프의 목소리와 짤랑거리는 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카이를 수마로 이끌었다. 사람은, 짤랑, 괜찮, 짤랑, 소원의 돌 때문에, 짤랑짤랑, 여기, 짤랑.

 

다시 눈을 뜬 건 새벽녘이었다. 눈을 뜨고서야 카이는 제가 잠이 들었음을 알았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자 커튼을 치지 않은 창 너머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본능적으로 화장실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던 카이가 별안간 자리에 멈춰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카이와 마찬가지로 러프가 벽을 보고 누워 잠들어 있었다. 별생각 없이 러프가 자는 모습을 잠깐 들여다본 카이는 또 별생각 없이 가려다 말았던 화장실로 직행했다.

 

잠에서 깨어나는 건 빠르지만, 잠에 취한 정신이 온정신을 되찾는 건 조금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던 카이가 정신을 차렸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때가 아니었다.

 

그러면 안 됐던 거 아닐까? 그러면 안 됐을지도 몰라. 화장실을 다녀온 카이는 서둘러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실수로라도 다른 곳에 눈을 두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흐르는 물에 손을 씻으면서 잠이 깼다. 멍하니 거울 속 자신과 시선을 맞추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무슨 열쇠지?

 

그제야 사고가 돌기 시작했다. 뒤늦게 돌아온 정신은 조금 전에 보았던 장면을 사진처럼 정교하게 재현해냈다. 깊게 잠든 러프. 자유분방하게 베개 위로 무너진 머리카락. 얼굴 옆으로 겹쳐진 두 팔. 손 옆으로 굴러다니는 노란색 고양이 모양의 키링과 매달려 있던 열쇠 하나. 무슨 열쇠지? 답은 질문이 나오기가 무섭게 나왔다.

 

베개 위로 머리를 두자 천장에서 후회가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가장 큰 의문은 두 개였다. 첫 번째. 그런 걸 내가 봐도 됐던 건가. 두 번째. 잠들기 직전 이상하리만치 머리가 맑았던 그건. 굳이 말하면 후자는 의문이 아니라 정답에 가까운 추측이지만.

 

쉽게 잠들지 못하는 짧은 새벽, 카이는 성급한 결론을 지었다.

보지 말걸 괜히 봤다.


 

* * *


 

나쁜 의도로 그런 것도 아니고 꼭꼭 숨겨 놓은 걸 들춰 본 것도 아니고 그냥 고개를 돌렸을 때 우연하게 본 것뿐이니 그게 죄라고 할 순 없는 거였다. 죄가 있다면 카이가 너무 섬세한 것이 죄라고 할까.

 

좋은 아침.”

 

서서도 자는 것 같은 얼굴로 러프가 인사를 건네자 카이는 어, 그래. 좋은 아침. 하고 얼결에 대꾸했다. 평소의 카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상냥한 인사였다. 어제까지의 카이라면 눈이나 뜨고 말하지? 라고 했을 거다. 자신의 평범한 대답에 놀란 카이는 들고 있던 칫솔을 제자리에 걸어두고 러프가 세면대 앞에 서기가 무섭게 잰걸음으로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정작 러프는 정신이 흐리멍덩해서 인사를 받았는지 어쨌는지도 몰랐다.

 

침대에 누워 두 손바닥을 얼굴 위로 덮은 카이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는 어제부터 요란한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댕댕. 큰 종이 울리더니 삽시간에 구성원들의 이목이 쏠렸다.

 

<MINI QUIZ>

Q. 섬세한 카이의 마음 속 죄책감을 누르는 버튼은 무엇일까요?

1. 러프가 옛날에 타던 바이크 열쇠

2. 러프가 옛날에 타던 바이크 열쇠에 달린 고양이 키링

3. 러프가 옛날에 타던 바이크 열쇠를 만지며 우울을 느낌

 

3. 러프가 옛날에 타던 바이크 열쇠를 만지며 우울을 느낌

 

정답입니다!

 

아씨. 카이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척 얼굴을 마구 뭉갰다. 간밤에 지은 결론은 아무 효과도 없이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었다. 잘못한 사람은 없고 피해 입은 사람만 둘(심한 타격을 입는 피해자1과 아무것도 모르는 피해자2)인 사건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판결이 났다.

 

나 혼자만 숨기는 건 비겁한 짓이니 똑같이 숨겼던 것을 오픈하도록 하라.

 

물론 법정은 카이의 머릿속이다. 그리하여 카이는 곧장 판결을 실행에 옮겼다. 가방 속 깊숙이 넣어두고 생각날 때만 몰래 꺼내 보던 사진을 단연한 태도로 책상 위로 올려두었다. 어찌나 긴장이 되던지 표정이 절로 심각해졌다. 내내 지켜볼 자신은 없어서 그대로 오후 내내 방을 비우기로 했다. 방문을 닫으며 카이는 제가 꼭 제리를 유인하기 위해 치즈미끼로 덫을 설치한 톰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재빨리 고개를 자로 저었다. 미쳤구나. 톰이라니. 고양이 같다던 러프의 말에 동화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고양이가 아니야. 결연한 의지를 새기며 방을 나섰다.

 

러프는 운동장에 있었다. 오늘도 옆엔 사람이 북적였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몰라도 조용하지는 않았다. 무리와 한참 떨어져 있는데도 가끔 고함이나 큰 함성 같은 게 들려오곤 했다. 스트레칭하던 카이는 러프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란한 기분이 되었다. 쟨 대체 언제 방에 가지?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질문이 머리를 뱅뱅 맴돈다.

 

카이는 작전을 조금 바꿨다. 같은 공간에 있으니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아서 평소와 다른 곳을 돌아다녔다. 관심도 없는 책을 읽기까지 했다. 그 사이 여러 가지 경우를 가정해보았다. 가장 구체적으로 대화의 흐름을 짠 건 두 번째로 가정한 사진에 관해 물을 경우.

 

이 사람 누구야?

넌 몰라도 돼.

 

간단하다 못해 허술하게 느껴지는 대화였지만 완벽했다. 카이는 러프가 그 이상 묻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더 캐묻는다면 어쩔 수 없이 열쇠 얘기를 꺼내야만 했다. 훔쳐본 건 아니고 어쩌다 봤는데, 로 시작하는 대사를 만들어 보니 구질구질하게 변명하는 사람 같아서 이상했다. 러프가 많은 걸 묻지 않기를 바랐다.

 

흐르긴 하나 싶던 시간을 죽이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뒤늦게 러프가 사진을 못 봤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났다. 진작 생각했어야 하는 가설인데 너무 늦게 생각났잖아! 어쨌든 카이는 방 앞까지 왔고 잠은 문고리를 놓을 순 없었다.

 

, . 어디 갔다 왔어?”

 

과자를 먹던 러프가 반가운 기색을 하며 카이를 반겼다. 너 하루 종일 안 보이더라? 눈썹까지 구기고 말하는데 일부러 너 안 보이는 곳으로 돌아다니고 왔다고 할 순 없으니 말을 씹었다. 하루 이틀 그러는 게 아니라 러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얘 진짜 사진 못 봤나. 무심한 척하려 무던히 애를 썼지만 카이의 발은 그렇지 않았던지 곧장 자신의 책상 앞으로 가 섰다. 사진이 없다. . 등 뒤로 터진 탄성이다.

 

너 사진을 그런 식으로 두면 안 되지. 잃어버려 그러다가.”

 

사진은 없고 웬 액자가 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걸 내가 발견했으니까 망정이지. 침대 밑이라도 들어가면 어쩔 뻔했어. 또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시작한 러프를 두고 카이는 액자 너머 사진을 뚫어져라 봤다. 초점이 나간 사진 귀퉁이에서 닥터헬이 웃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가정하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자 머리에선 이제 어떻게 하지? 빨간 비상벨이 울렸다. 하지만 머리와 반대로 몸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였다.

 

 

러프는 너무 빨랐고.

 

. 내 이름 카이야.”

 

그 애를 돌려 세우고 싶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카이는 겨우 빠르게 달리는 러프를 조금 따라 잡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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