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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러프] 눈을 보러 가자

*커미션으로 작업했습니다 공미포 약 4700자

*테일즈런너




기억이란 간사해서 가장 처음부터 남아 있는 법이 없다. 태어난 그 순간을 기억하는 건 물론이고 한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최초의 기억은 누구나 다르다. 떠올릴 수 있는 것중 가장 오래된 기억 속 카이는 온통 하얀 복도에 있었다. 하얀 복도를 걸으며 플라스틱도 벽돌도 아닌 것 같은 벽을 빤히 바라보았다. 꼭 눈처럼 하얗구나. 반걸음 정도 뒤에서 따라오던 닥터헬의 말에 카이는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 카이는 손가락으로 제 눈을 가리켰다. 닥터헬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다른 눈.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건데 하얗고 차가워.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 그런 건 처음 들었다.

 

나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말하며 다정하게 웃어주는 얼굴이 좋아서 카이는 소박한 꿈 하나가 생겼다. 눈을 보는 것. 그게 소박한 따위의 수식어를 붙일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건 반년이나 지난 후에야 알았다. 여긴 눈이 오지 않는 나라였다. 겨울이면 눈이 온다는 말에 매일같이 창문에 매달려 밖을 내다보아도 풍경이 하얗게 물든 적은 없었다. 한 번도 밖을 나가보지 못한 카이에겐 이 건물과 창문으로 내다보는 세상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제가 보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따윈 생각도 못할 정도로 카이의 세상은 작았다.

 

돌아오는 겨울마다 번번이 허탕을 치면서도 카이는 창밖을 내다보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옳은 말을 하니까. 눈이 오지 않는 건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그래. 카이는 언젠가 그 때가 올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눈을 보러 가자

카이러프



카이가 그 작은 세상을 벗어난 건 닥터헬이 죽고 난 뒤였다.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는데 어른들의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본 적 없는 이들은 검은 차를 타고 왔다. 필요한 짐을 챙기고 카이를 데리고 다시 검은 차에 탔다. 뭐야. 짜증 섞인 카이의 질문에 그들은 낯빛을 바꾸지도 않은 채 앞으론 자신들이 카이를 보호할 거라는 지극히 필요한 말만 했다.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했지만, 무슨 소리냐는 말에는 돌아오는 답이 없어서 카이는 입을 다물었다.


안녕?”


오자마자 처음 만난 아이였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왼쪽 귀에 달린 빨간색 십자 모양 피어싱. 처음 만났는데도 구김 없이 인사를 건네 와서 오히려 카이가 당황했다. , 안녕. 그렇게 답해줘야겠다 생각은 했는데 진짜로 인사를 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카이의 시선은 아이의 얼굴이 아니라 조금 더 높은 곳에, 삐죽삐죽 뻗친 머리칼에 있었다. 눈처럼 하얀 머리.


, 너 눈 본적 있냐?”

? 글쎄.”


첫 만남에 다짜고짜 나온 질문에 러프는 당황한 기색 없이 대답을 했다. 답을 다 해놓고서야 눈썹을 치켜 올려 뭔가 고민하는듯하더니 이내 카이와 눈을 마주보았다.


? 눈 보고 싶어?”


묻는 말투가 퍽 간지럽게 들렸다. 그런 말투를 써본 적이 없어서 그랬다. 간지러운 말투에 면역이 없는 카이가 괜히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이니 러프가 조금 크게 뜬 눈을 두 번 정도 깜빡거렸다. 그러다가 불쑥 거리를 좁혔다.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크게 뜨더니 그랬다. 그럼 봐. 번쩍 뜨인 빨간색 눈동자에 한 가득 카이 얼굴이 들어찼다. 뭐하는 거지. 생각을 하느라 바로 반응을 못했다.

 

. 그제야 러프가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깨달은 카이가 팍 인상을 찌푸리자 러프가 후다닥 얼굴을 뒤로 물리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웃는 얼굴에 퍽 약이 오른 카이가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


보고 싶다고 해서 보여줬는데 왜 화를 내냐!”


말을 하면서도 러프는 멀리 달아났다.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어찌나 빠른지 벌써 저 멀리로 간 러프가 손바닥만 하게 보였다. 하하 크게 웃는 소리에 분한 마음만 씩씩 내뱉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나는 진지했는데, 걔는 그걸 가볍게 받아서 진심이 폄하된 것 같았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는 바라는 것과 현실이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을 자주 맞닥뜨렸고 눈처럼 하얀 머리칼을 가진 애의 이름이 러프라는 걸 알게 된 때에도 짜증이 나긴 했어도 별달리 놀라진 않았다.

 

이곳 사람들 중에 러프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어른들은 카이에게 러프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어른들이 러프를 왼쪽 귀에 빨간색 십자 모양 귀걸이를 한 애, 라고 설명한 탓에 카이는 처음에 그들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몇 가지 부가 설명이 붙고 나서야 그 애가 러프라는 걸 알았다.

 

이름을 안다는 건 보기보다 편하다. 불쾌한 첫인상을 심어준 녀석을 눈 같은 머리칼을 가진 녀석이라 기억하는 것보단 러프 녀석쯤으로 기억하는 게 훨 기분이 나았다. 꿈과 가까운 단어로 그 애를 정의하는 건 굉장히, 특별함을 덕지덕지 붙인 것처럼 어색하고 또, 이상했다.


카이. 이쪽으로 나와.”


닫힌 방문이 열린 건 카이가 위험하지 않은 존재로 판단된 이후다. 하얀 가운을 걸친 어른들이 문을 열고 카이를 부를 때, 카이는 제가 이곳에 온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해보려 했다. 열흘 정도까지 세었을 때 그만뒀다. 얼마나 지났든 혼자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오라는 말에 연구원을 따라 걸으면서 들리는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다른 곳에서 지내게 될 거라는 말과 거기엔 달느 아이들도 있다는 이야기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지금처럼 검사를 하게 될 거고 평일 오후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훈련이 있을 거라는 말도. 커다란 문이 나오고서야 설명도 끝이 났다.

 

뭔가 궁금한 게 있니?”

 

제대로 듣지도 않았는데 궁금한 게 있을 리가. 없는데. 퉁명스럽게 말하려다 카이는 뒷목을 매만졌다.

 

밖은 나갈 수 있나?”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걸.”

 

예상한 답이었다. 닥터헬과 함께 있을 때도 밖은 나갈 수 없었는데 저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자유로운 행동을 하도록 둘 리가 없었다. 거절의 답에도 카이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연구원은 카이를 힐끔 보더니 더 이상 질문이 없음을 예상한 듯 큰 문을 열었다. 환영한다. 말을 하며 안으로 들어가라 손짓했다.

 

! 눈보고 싶은 애다!”

 

안으로 한 걸음 딛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카이를 반겼다. 하필 또 입구 가장 가까이에 서있던 그 애는 카이를 알은체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언젠가 들었던 말투로 인사한 러프를 보며 카이가 인상을 팍 구겼다. 눈보고 싶은 애. 지나치게 특별한 거 같은 명칭이 마음에 안 든다.

 

카이야.”

?”

이름. 카이라고.”

 

그러니까 그딴 걸로 부르지 마. 잘 갈린 날붙이 마냥 날카로운 말투에 러프가 인상을 구기더니 이내 아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이름으로 안 불러서 삐졌구만?”

 

카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럴 수 있지. 내 이름은 알아? 나는 러프야.”

그건 알,”

! 물론 나는 이름으로 안 불러도 삐지고 그러진 않아. 괜찮아.”

 

억양이 개구쟁이처럼 통통 튀었다.

 

죽고 싶냐?”

죽고 싶은 사람도 있어?”

 

능구렁이 같은 답에 참지 못한 카이가 손을 뻗자 어느새 러프는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첫 만남과 똑같았다. ! 너 거기 안 서?! 고함을 지르며 그 뒤를 카이가 쫓았다.

 


* * *

 


? 너도 눈이 뭔지 모른다고?”

눈이면 이거잖아.”

 

러프의 검지가 자신의 빨간 눈동자로 향했다. 그 모습에서 카이가 보였다. 그것도 눈이지. 그것도 눈인데.

 

그거 말고 다른 눈.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건데, 네 머리카락처럼 하얗고 또 차가워.”

 

언젠가 들었던 닥터헬의 설명을 마치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처럼 줄줄 읊으니 마주 앉아 밥을 먹던 러프의 표정이 변했다. 우와. 감탄 섞인 표정으로 물끄러미 카이를 보던 러프가 별안간 눈을 가늘게 떴 다. .

 

왜 그렇게 잘 알아? 너 사실 본 적 있지.”

누구한테 들었어.”

누구?”

 

말해줄까. 맞닿은 입술을 뗐다가 도로 다물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닥터헬은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잊을만하던 사실은 화요일 또 금요일 에 검사를 받으러 간 날마다 깊게 상기되었다.

 

있어.”

 

대충 얼버무리는 말에 러프가 더 물어보지 않자 다행이란 생각과 답답함이 함께 파도처럼 밀려왔다. 러프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린 카 이를 신경 쓰지도 않고 소세지를 씹더니 꿀꺽 삼킨 후에야 카이를 똑 바로 보았다.

 

뭔가. 눈 본적 있는 거 같은데.”

 

그 말에 먹던 걸 잘못 삼킨 카이가 콜록거렸다. 괴로운 표정으로 기침을 연달아 하는 탓에 러프가 당황한 얼굴로 연신 야 괜찮아? 했 다.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매단 카이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치켜떴다. 빨리 더 말해보란 뜻이다. 아직도 콜록대는 카이를 미 심쩍은 눈으로 살핀 러프는 무언의 재촉에 떠밀려 음, 그러니까, 하고 운을 뗐다.

 

본지 좀 오래 됐는데. 다른 곳에서는 안 보이고 거기서만 보여.”

거기?”

우리 방 가는 길에 있는 복도 쪽에서 갈라지는 길 있잖아. 거기서 큰 기둥 뒤로.”

 

러프의 설명은 장황했고 쓸데없는 내용이 많았으며 두서없었다. 간 단하게 말하자면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는 말이다. 긴 설명이 끝난 뒤 카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그게 어딘데.”

 

그 말에 러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답답하다는 표정이다. 자기가 설명을 이상하게 했으면서. 대꾸했다간 더 말을 안 해줄 것 같아 참았다. 한 차례 더 설명이 이어졌지만, 두 번 듣는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을만한 설명은 아니었다. 전혀 모르겠다고 했더니 이번엔 러프가 한숨을 푹 쉬곤 그럼 어쩔 수 없지, 했다.

 

내가 같이 가줄게.”

 

그때 처음으로 카이는 러프가 괜찮은 녀석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괜찮은 애잖아? 까진 아니고 좀 짜증나고 귀찮긴 한데 그렇게 이상한 애는 아니네. 정도로.


물론 얼마 가지 않을 평가였다.

 

. 아니. , 너는, .”

 

눈이 뭔지도 알았고 볼 수 있는 장소도 알았는데, 중요한 건 그걸 언제 봤는지를 기억 못했다. 아치형 창문엔 나무로 된 창틀이 십자가 모양으로 금을 그렸다. 오른쪽에 갈색 나무 기둥이 반쯤 보이는 걸 빼 면 높은 벽이 창을 가득 채웠다.

 

애초에 그게 뭔지도 몰랐고 그냥 지나가다가 본건데 어떻게 기억하냐.”

 

러프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을 했다. 답답한 마음에 창밖만 뚫어지게 보느라 카이는 별달리 말을 못했다.


처음 찾아간 창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다만 그 장소는 일종의 지정석이 되었다. 눈을 보지 못한 실망 보다는 언젠가 볼 수 있으리란 기대로 매일 그 앞을 지났다. 처음을 함께 했기 때문인지 러프도 함께였다.


카이가 정기 검사를 받으러 갈 때면 러프가 먼저 창 앞에 다리를 펴고 앉아 카이가 오길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도 제대로 못해 반쯤 졸 고 있는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어디서 났는지 과자 를 먹거나 창밖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사람이 오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창틀에 두 팔을 겹쳐 올린 러프 옆으 로 카이가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이크가 타고 싶어.”

 

대답을 하지 않자 러프가 고개를 돌렸다.

 

카이 넌 눈이 보고 싶댔잖아. 나는 밖에 나가서 바이크로 돌아다니는 게 꿈이야.”

바이크가 뭔데.”

 

물었더니 러프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도 모르냐는 듯 으스대며 말을 꺼내는데 신기하게도 별로 기분이 나쁘거나 평소처럼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목소리에 신이난 기색이 느껴져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뭔가 카이는 처음부터 하고 싶은 게 뭔지 말했는데 난 아무것도 말 안 해준 거 같아서.”

 

별로 말 안 해도 상관없는데. 카이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줬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난 고양이도 좋아해. 여전히 1절에서 그칠 줄 모르는 러프는 시끄러웠다. , 그만해. 결국 카이가 짜증을 부리고서야 대화가 끝났다.

 

.”

 

창으로 하얗고 작은 것이 보였다. 나풀거리면서 내려온 것이 유리창 을 스치자 카이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한두 개 떨어지나 싶던 하얀 동그라미는 이윽고 여러 개가 한 번에 바람에 흩날렸다. 두 사람은 잠 깐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바람을 타고 춤추듯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맞지? .”

 

하얗고 하늘에서 내리잖아. 러프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만큼 카이는 창밖의 풍경에 심취했다. 뒤늦게 러프가 창문에 손 가락을 올리곤 덧붙였다.

 

차가운지는 모르겠어.”

그렇겠네.”

 

빈정대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동의의 표현이었다. 추운 날 하늘에서 내리는 하얗고 차가운 거라고 했는데. 지금은 춥기는커녕 옆에 딱 붙 은 러프의 어깨 탓에 오히려 훈훈한 기운이 돌았다. 카이는 괜히 슬쩍 러프의 하얀 머리칼에 시선을 주었다.

 

나중에 나갈 수 있게 되면 만져보자. 차가운지.”

 

러프의 말에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 거 내가 바이크도 태워줄게. 시원스럽게 눈매가 휘어졌다. 괜히 보고 있기가 간지러워 카이는 다시 창밖만 바라보았다. 아직도 드문드문 눈이 떨어졌다.

 

안 그래도 되는데.”

러프님의 바이크 실력은 의심하지 않아도 좋아.”

그런 말 아니거든.”

 

눈썹을 구기며 카이는 언젠가 이곳을 나갈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진짜 눈을 맞은 날. 그 날 봤던 것이 눈이 아니라 벚꽃잎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눈을 보러 가자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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