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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케이] 솔직해질 수 없는 나와 나의 소중한 당신

도어락의 뚜껑을 열고 기억하고 있는 비밀번호를 누르자 귀에 익은 소음이 났다. 그대로 열었던 뚜껑을 닫으면 문이 열리는 시스템은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아직도 쿠로에겐 영 낯설었다. 다녀왔어. 돌아올 답이 없음을 알면서도 언제나 인사를 했다. 어쩌다 답이 돌아올지도 모를 날을 위한 것이었다. 아직까지 그런 날은 한 번도 없었지만.


어두컴컴한 벽에 손을 짚고 신발을 벗고 나면 전등 스위치가 있는 곳까지 금방이었다. 환하게 켜진 불을 등지고 쿠로는 손에 쥐고 있던 비닐봉지를 식탁 위로 올려두었다. 매일같이 들르는 마트의 로고가 박힌 하얀 봉투를 뒤적이니 상품권 하나가 끼인 것이 보였다. 상품권을 집어 들었다. 500엔 할인 쿠폰. 계산대에서 씨름을 한 것이 떠올랐다. 단골이니 몰래 하나 챙겨주겠다는 걸 극구 사양했는데도 기어코 집어넣은 모양이다. 쿠로는 쿠폰을 잠시 노려보다가 영수증과 함께 식탁 구석으로 밀어 놓았다. 우선은 해야 할 것이 많았다. 케이토가 돌아오기 전까지 편안하게 쉴 준비를 모조리 해놓고 싶었다.


나왔어.”

, 나리. 어서와.”


쿠로가 가스 불을 껐다. 타이밍이 좋았다. 손을 행주에 대충 닦고 뒤를 돌자 어느새 코앞까지 케이토가 다가와 있었다. 된장국인가. 냄새가 좋군. 넥타이를 풀어내며 하는 말이 나쁘지 않았다. 오늘은 유부를 넣어봤어. 받아치면 케이토가 아무것도 아닌 투정을 쏟아냈다. 뭐가 됐든 콩만 아니면 된다느니, 그래도 키류 네가 만든 요리는 맛있으니 조금 정도는 괜찮다느니 하는. 더없이 마음이 편해진다.


마주 앉아 식사를 하다 케이토의 그릇이 다 비워지기가 무섭게 쿠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욕실로 향하는 등에 대고 케이토는 천천히 먹고 일어나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욕조에 물 같은 건 나도 받을 수 있다. 걸음을 멈춘 등이 돌아본다.


내 역할이 그런 거잖냐.”


한숨처럼 터진 짧은 웃음과 함께 나온 말에 케이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쿠로가 욕실로 사라졌다.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은 소용이 없었다. 부족한 말은 아무리 부어도 채울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럼 왜, 라고 떨어질 질문에 솔직한 답을 할 수 없는 스스로가 나쁘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케이토는 벗은 안경을 식탁 위로 올려두다 구석에 놓인 영수증과 쿠폰을 보았다. 욕실에서 울리는 물소리가 처연했다.

 


솔직해질 수 없는 나와 나의 소중한 당신

w.

 


먼저 동거를 하자고 제안한 건 케이토였다. 졸업식이 끝나갈 무렵 학생회장실에 있던 건 둘뿐이었다. 키류. 졸업하면 어떻게 생활 할 생각이지? 쿠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 전까지 소마가 여기 있었는데 언제 나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니까 바로 생각이 안 났다. 글쎄. 일단 간단한 아르바이트나. 아가씨를 도와서 의상 만드는 일을 해도 재밌을 것 같고. 대학진학을 하지 않으니 아이돌 일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할 것이 필요했다. 떠오르는 것 중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골라 늘어놓는데 뭐가 그리 급한지 케이토가 불쑥 그 사이로 들어왔다.


정해진 게 없다면 나와 사는 건 어때.”

상관은 없지만 하스미 너 예민하지 않아?”

그게 무슨 뜻이지?”

인상 풀라고, 나리. 욕이 아니라 나 같은 놈이랑 같이 살아도 괜찮겠냐는 의미야.”

너니까 믿는 거다.”


그거 전혀 대답이 안 되는데. 납득이 가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쿠로는 케이토의 제안을 수락했다. 고민할 새가 없었다. 금세 복도가 시끌벅적해서 빨리 이야기의 끝을 맺어야 했다. 이래서 답지 않게 급했던 건가. 뒷목을 긁적이며 쿠로는 알겠다고 답했다. 매일같이 붙어 있던 팀메이트와 하루아침에 떨어지는 건 쓸쓸할지도 모르고-케이토가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무언가 필요가 있기에 자신을 데려가는 게 분명했다.


동거를 하고서야 쿠로가 안 사실이 많았다.


첫 번째로 케이토는 무척이나 바쁘다. 케이토가 여유로운 학창시절을 보냈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만, 지금은 눈에 안 보이는 시간이 늘었다.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음에도 쿠로가 케이토를 보는 시간은 아침과 저녁 고작 그뿐이었다. 집을 나서는 반듯한 얼굴이 보지 못하는 몇 시간 사이에 피곤에 흐트러진다. 쿠로보다 대학 동기가 더 케이토의 얼굴이 익숙할 게 뻔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귀가하는 얼굴에서 자연스레 쿠로는 자신의 역할을 찾았다. 케이토가 등교하기 전에 일어나 간단한 아침을 준비하고, 케이토가 없는 시간에는 집안을 정리했다. 욕실 청소도 했고 빨래도 했다. 케이토의 귀가 시간이 가까워지면 집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저녁을 지었다. 받은 영수증은 잘 보이도록 식탁 구석으로 밀어놓았다. 처음 식탁구석에 놓인 영수증을 본 케이토는 뚱한 얼굴이었다. 피곤에 일그러진 건지 영수증에 일그러졌는지 모를 표정이라 별로 마음에 두진 않았다.


키류. 할 말이 있는데.”


굳은 얼굴로 부르기에 쿠로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낮은 탁자를 사이에 둔 케이토의 맞은편에 앉았다. 말하라는 듯이 보니 케이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영수증이다. 이게 왜? 다시 케이토를 봤다.


며칠간 네가 준 영수증을 보는데 뭔가 이상해서 말이지.”

? 받은 그대로 뒀는데 뭔가 계산 틀렸나?”


그제야 영수증을 꼼꼼하게 들여다봤다. 장을 본지가 언젠데 지금 본다고 제대로 알 수 있을 리가 없지만 이상하다고 하니 그렇겠거니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왜 영수증에 내 것밖에 없는 거지?”

그야 나리의 돈이잖아.”


깔끔한 대답에 케이토의 눈썹이 꿈틀댔다. 생활비 대부분을 케이토가 대고 있었다. 그건 정당한 비율이었다. 자취의 고민도 대책도 없던 사람을 데려왔으니 케이토가 값을 더 지불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한 사실이 불편하지도, 전혀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케이토는 그랬다. 다만 케이토가 그렇다고 쿠로도 그러리라는 건 허울 좋은 망상이다. 쿠로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란 걸 쉬이 상상할 수 있었는데 진작 말을 꺼내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여기엔 네 돈도 포함되어 있다. 금액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아.”

딱히 필요한 게 없었을 뿐이라고.”

그래도,”

또 저녁 메뉴를 고르는 건 나니까 어찌 보면 그건 내가 쓴 거기도 하고.”


그만하자. 이런 얘기. 슬슬 잘 시간 아니야? 뻗은 손가락을 따라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이 그랬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지만 슬슬 눈이 감겼다. 쏟아지는 잠이 논리에 힘을 앗아갔다. 한숨과 함께 케이토가 순순히 방으로 향했다.


잘 자. 하스미.”


들리는 인사에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물었다. 잘 말린 이불에선 볕 냄새가 났다. 골랐다는 메뉴가 죄다 케이토가 좋아하는 음식인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그런 배려가 필요해서 널 데려온 게 아니야. 케이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겨 썼다. 숨이 막혔다.

 

손 내밀어 봐.”


케이토는 펼쳐진 손바닥 위로 짝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을 마주쳤다. 놀랄 틈도 없이 떨어져나간 손대신 쿠폰이 놓여 있었다. 졸음이 그득한 눈으로 쿠로가 쿠폰을 이리저리 살폈다. 500엔 할인 쿠폰. 기시감이 느껴지는 문구가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제 마트에서 받은 쿠폰. 식비를 아끼라는 뜻인가. 잠을 갈망하는 머리는 둔했다.


그건 네가 가져라, 키류.”

생활비에 보태서 쓰라는 말이지?”

아니. 네가 써.”


눈만 깜빡이고 있자 케이토가 재차 말했다.


네가 사고 싶은 게 보이면 그걸 쓰라는 뜻이다.”

? 딱히 그런 게,”

늦을 거 같으니까 간다.”


케이토가 집을 나섰다. 늘 제시간보다 일찍 나가면서 늦기는. 불평은 속으로 담아두고 받은 종이조각을 노려보았다. 애물단지처럼 여겨졌다. 이래서 받기 싫었던 건데. 그대로 식탁에 올려두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도 늦을 것 같지가 않다.



자고 일어나도 쿠폰은 여전히 애물단지였다. 쓰고 싶은데 쓰라는 말을 들어도 쿠로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애초에 케이토가 낸 생활비로 받은 쿠폰인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쓰는 건 이상하다. 기한, 1031일까지. 하단에 쓰인 날짜까지는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적어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케이토가 납득할만한 선에서 고르고 싶었다.


썼나?”


아직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 앞에 서서 하는 말이 그랬다.


오자마자 잔소리는.”

썼어?”

아직 안 썼어. 어디 쓸지 생각하는 중이야.”


쿠로가 접은 수건을 욕실로 날랐다. 집에 있는 건 작은 수건뿐이니 이참에 대형 타월을 하나 장만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기왕이면 호텔에서 쓸 것처럼 두툼한 것으로. 500엔으로 사기엔 너무 비싸려나.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생활비에 그걸 쓸 생각은 마.”


문밖에서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좋은 타이밍에 목소리가 들렸다. 귀신같기는. 쿠로가 수납장을 닫았다. 욕실을 나오니 케이토가 없었다. 방에 들어갔나 싶었는데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끓여놓은 국을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려두는 모양새가 왠지 어색했다.


내가 하면 되는데.”

나도 이 정도는 할 줄 안다.”


그런 뜻은 아니지만. 대꾸하는 대신 쿠로는 밥그릇을 들고 밥솥 앞에 섰다.


놔둬. 내가 할 테니까 앉아 있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케이토가 그랬다. 동거를 시작한 이래로 케이토는 쿠로가 집안일을 하는 것에 썩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던 사람이 느닷없이 자기가 하겠다고 나선다. 쿠로는 멀뚱히 손에서 주걱을 가져가는 케이토를 빤히 보았다. 옅은 녹색 눈동자가 도르륵 자신을 향해 굴렀다.


왜 그러지?”

하스미 갑자기 왜 그래?”

뭐가.”


케이토가 금세 밥 두 그릇을 펐다. 눈으로 그릇에 담긴 양을 가늠하는 것처럼 들여다보더니 그대로 식탁에 하나씩 올려두었다. 다 됐다. 먹자. 꾸역꾸역 식탁에 앉으면서도 쿠로의 마음은 고요할 줄을 몰랐다.


가끔은 내가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폭탄을 던져놓고 케이토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쿠로도 따라 젓가락을 들었으나 식욕이 없었다. 해일이 넘실대는 마음이 어지럽다. 억지로 밥을 삼킨 속은 잠들기 직전까지도 더부룩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의 설거지도 케이토가 했다. 느린 손길로 접시에 수세미질을 하는 걸 잠깐 보다가 거실 소파에 드러눕듯 앉았다. 집안일을 하지 않으니 마땅히 할 것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땐 남는 시간에 뭘 했지. 가라데부에서 수련을 하거나 의상을 만들었다. 주변이 북적대고 소란스러워 심심할 틈이 없었다. 지금은 어떻지. 집에선 의상을 만들 일이 없다. 케이토는 스스로가 할 일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고 그 일에 자신이 필요해 보이진 않는다. 돌아온 집에서도 케이토가 집안일을 해버리니 쿠로가 할 몫이 줄었다.


케이토의 가끔은 내가 하기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건조대에 걸린 빨래를 개거나 다 먹은 식기를 깨끗하게 닦는 일 등을 쿠로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저녁 식사가 끝날 때쯤엔 눈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설거지는 내가 하지.”


재빨리 식사를 마친 쿠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케이토의 말이 발목을 잡았다. 그릇에 남은 국물을 마신 케이토가 빈 그릇을 포갰다. 그대로 싱크대에 넣고 쿠로가 들고 있는 그릇까지 싱크대에 담군 후 물을 틀었다.


키류 좀 비켜주지 않겠나.”

, 미안.”


허겁지겁 싱크대의 반을 가로막은 몸을 물렸다. 계속 보고 있어도 어쩔 수 없는데 그곳을 벗어나도 마땅히 할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


먼저 목욕이라도 해.”

하스미 네가 먼저 해. 난 두 번째엔 익숙하니까.”

키류. 나도 꼭 첫 번째를 고집하진 않는다. 네가 먼저 욕조를 쓴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케이토가 고집을 부리고 있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쿠로는 그렇게 짐작했다. 아니면 내게 화를 내고 있거나. 딱딱하게 굳은 말투는 그렇게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그 말에 떠밀리듯 욕실로 들어왔다.


김이 오르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밖에서 나는 소음이 간간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섞여 선명하게 들렸다. 쏟아지는 물소리가 사라졌다. 설거지 끝났나. 방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목욕 후 입을 옷을 챙기는 듯 했다. 슬슬 비켜주는 게 좋겠군. 욕조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켰다.


벌컥. 고개가 열린 문으로 향했다. 하스미, 잠깐만. 지금 나갈게. 기다리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토가 안으로 들어왔다.


? , 잠깐만. 하스미?”


뭐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에 어디로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쿠로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욕조 앞까지 바짝 다가온 케이토가 쿠로를 불렀다.


키류, 다리 좀 치워봐.”

들어오려고?”


답을 하지도 않고 케이토가 욕조 안으로 다리 한 짝을 밀어 넣었다. 쿠로는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구부려 공간을 만들었다.


아니, 진심이냐. 하스미.”


케이토가 꿋꿋이 두 다리 모두 욕조에 넣고 빈 공간으로 몸을 접어 넣었다. 수면이 조금 더 높아졌다. 180에 가까운 성인 둘이서 욕조 하나에 들어찬 모습은 함께 목욕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욕조에 끼였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해 보였다. 욕조 끝과 끝에 마주 보고 앉아 무릎을 굽힌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웃음도 안 나올 거다.


편하게 있어. 내가 나갈게.”

키류.”


몸을 일으키자 물이 출렁거렸다.


괜찮으니까 앉아 있어.”


가슴께까지 당긴 다리 위로 턱을 올린 케이토가 쿠로를 보지 않고 말했다. 안경을 벗은 눈으로 앞이 제대로 보이긴 할까. 욕실의 습기가 벌써 케이토의 머리에 달라 붙어있었다. 그대로 욕실을 나갈까 망설이던 쿠로가 다시 욕조에 앉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쿠로의 생각과 달리 케이토는 조용했다. 물에 담그지 못한 어깨가 시렸다. 케이토는 여전히 무릎 위로 턱을 올리고 욕조의 어딘가를 응시한 채로 미동이 없다. 애써 들을 준비를 끝냈는데 케이토가 묵묵부답이니 초조함은 쿠로의 몫이 되었다. 이렇게 불편한 상황을 굳이 만든 데에 이유가 없을 리는 없다.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하스미.”


자신이 듣기에도 볼품없는 목소리였다. 녹색 눈동자가 쿠로를 향한 채 말을 기다린다.


하스미 너, 혹시 말이야. 나한테 같이 살자고 권유한 걸 후회하냐?”


케이토가 내내 무릎에 얹었던 고개를 들었다. 눈썹이 아주 약간 비틀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그런 걸로 새삼 상처 받지 않는다고.”


케이토의 미간에 짙게 주름이 잡혔다. 후회라니. 그런 건 조금도 한 적이 없다. 쿠로는 눈썹을 팔자로 눕히고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케이토를 염려하는 미소였다. 웃기지마. 그런 배려가 필요한 게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오해다.”


한 마디로 모든 걸 일축하려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꼭 바람이라도 핀 남편의 대사처럼 들렸다. 말을 하면서도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을 치는 것 또한 다를 바 없었다.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욕조에 팔을 걸친 쿠로가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리가 스스로 집안일을 하면 나 같은 게 더 이상 같이 있을 필요가 있겠냐.”

할 일이 없다고 해서 키류 네가 내 룸메이트란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아.”

,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맞는 말이긴 한 게 아니라 그게 사실이야. 난 네놈을 가정부로 부른 게 아니다.”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케이토의 말은 어떤 말을 해도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강경했다. ‘나 같은 것이라는 명칭을 들을 때마다 관자놀이가 지끈댔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키류 너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고 대단한 사람이라 말해야 했다.


…….”


그럴 자격이 내게 있던가. 케이토는 두 손을 모아 욕조에 담갔다 뺐다. 손바닥 위로 담긴 물이 틈새로 쏟아졌다. 다 쏟아지기 전 얼굴로 가져가니 닿은 곳이 따뜻해졌다.


이건 벌이다. 각본을 위해 쿠로를 이용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 뒷감당이 스멀스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다가 이제야 케이토의 목을 천천히 졸랐다. 소중한 사람에게 확신을 줄 수 없는 벌의 무게가 이제야 느껴진 탓이다.


키류.”


피해자는 온전히 쿠로였다.


떠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이 생활이 네게 고통이라면 굳이 감내할 필요는 없어.”


젖은 앞머리에서 떨어진 물이 욕조 위로 작은 파동을 만들었다. 힘이 빠진 편안한 얼굴이 쿠로의 눈에 밟혔다. 인상하나 쓰지 않고 있는데도 어딘가 쓸쓸했다. 그런 건 아니다. 고통 같은 괴로운 감정이 아니다.


나리 얼굴이 빨간데 이만 나갈까?”


그런 게 고통이었다면 따라오지 않았을 거야, 하스미.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던 쿠로는 케이토를 불렀다. 여기 앉아봐. 의자를 발로 툭툭 치자 케이토가 의자에 앉았다.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이 머리를 매만졌다. 네 머리는 어쩌고. 짧으니까 금방 말라서 괜찮아.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케이토의 머리를 손으로 살짝 눌러 앉혔다. 별 저항 없이 얌전했다.


나리 쿠폰 기억해?”

할인 쿠폰 말이지. 물론이다. 어디다 쓸지 정했나?”

그래. 딱 맞는 게 생각났어.”


머리로 머리칼을 헝클어뜨릴 때마다 작게 물방울이 튀었다.


그게 뭐지?”


거울 속에서 쿠로가 씩 웃었다. 케이토는 조금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했지만 쿠로는 웃기만 할뿐 말이 없었다. 키류. 이름을 부르자 하하하 소리까지 내며 웃는다. , 비밀이야. 싱겁게 끝난 대화에 케이토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으나 고작 그 정도로 끄떡할 쿠로가 아니었다.


할일이 없다고 해서 키류 네가 내 룸메이트란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아.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샜다. 그 웃음이 자신을 놀리는 거라 생각한 케이토가 화를 내기 시작했지만 한 번 터진 웃음은 쉽게 멈추지를 않았다. 나리는 말을 참 어렵게 한단 말이야. 똑똑한 사람도 좋지만은 않구만. 실없는 생각이 났다.

 


다음날 귀가한 케이토를 맞은 건 거실 바닥에 늘어진 천과 낮은 탁자에 놓인 바느질 세트였다. 굴러다니는 천 중앙에 쿠로가 앉아 있었다. , 어서 와. 나리. 온 지도 모를 정도로 집중을 하고 있었는지 놀란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이크, 내 정신 좀 봐. 저녁을 깜빡했잖아. 하스미, 거기 적당히 앉아서 기다려. , 아니면 목욕부터 할래?”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난 쿠로가 바쁘게 거실과 부엌을 오간다. 그런 정신없음을 앞에 두고도 케이토는 아무 말 없이 거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키류.”

?”

혹시 샀다는 게.”

, 그거야.”


냉장고를 뒤지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대답을 한다.


비는 시간에 나리한테 뭔가 만들어주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서.”


지극히 쿠로다운 대답이었다. 케이토는 말을 하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입만 뻐끔댔다. 며칠을 고민해서 고른 물건도 그 목적도 어느 하나 쿠로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에 힘이 풀렸다. 덩달아 풀린 얼굴 근육에서 뻐근함이 몰려왔다.


나리, 간단한 거밖에 없는데 국수 괜찮아?”


케이토가 가볍게 웃었다.


좋다, 국수.”


부엌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왕이면 더 이기심을 발휘했으면 좋겠지만, 어찌 되었든 할인 쿠폰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썼으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이것으로 좋겠다고. 면은 내가 삶지. 케이토가 단단한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솔직할 수 없는 스스로를 잠시 묻어두면서.

 

 


솔직해질 수 없는 나와 나의 소중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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